말씀 : 2006년 부활주일 기념설교 / 부활의 두 가지 복
본문 : 마태복음 28장 1-10절 말씀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칼 바르트는 "십자가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과 둘째는 인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쉽게 보여준 복음의 이야기가 두편이 있다. 하나는 노아의 방주사건이다. 또 하나는 모세를 통한 출애굽과 유월절 사건이다.

노아의 방주사건
방주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역청으로 안팎이 칠해지므로 온통 역청의 향기가 가득했던 방주처럼 교회는 보혈의 향기로 가득해야 한다. 보혈의 향기란 ? 용서와 사랑, 회개와 희생을 말한다. 이런 모습으로 가득한 교회가 향기로운 교회이다. 노아의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방주 밖의 그 어떤 것도 노아의 소유는 없었다. 그가 살았던 옛집도, 보화도, 다 사라졌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안에서 경험한 새로운 기쁨이 세계가 열렸다. 빌립보서 3장 7-9절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성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겨야 할 것이 있다. 배설물로 여겨야 할 것이 있다. 버려야 할 것들, 멀리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 밖에서 잃은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물질보다 더 큰 하늘의 보화를 얻었다. 세상에서 잃은 명예보다 더 자랑스런 하늘 가문의 영광을 얻게 된다. 노아는 죄악이 관영했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성도는 세상에서 세련된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습관대로 살기에는 왠지 모르게 어색하다. 역청이 발라진 방주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노아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갔더니 나올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으나 부활을 통해 어둠의 세력까지 완전치 통치하시게 되셨다.

출애굽
출애굽기 12장 22-23절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애굽기 12장 42절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유월절을 지켜야 할 그 날 밤은 여호와의 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밤은 장자의 죽음과 삶을 가르는 역사적인 밤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그 날 밤으로 결정되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날 밤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호와를 만난 여호와의 밤이 있었기에 걱정이 없다.

왜 모세는 홍해로 갔을까?
모세도 아론도 바로도 광야로 나가는 길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홍해로 갔을까? 출애굽기 12장 51절을 보면 "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하나님이 백성을 직접 인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왜 하필 홍해 쪽으로 몰아 가셨을까? 홍해로 몰아가신 하나님의 의도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복음적인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였다. 둘째는 사단의 최후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홍해는 구원의 길이었다. 복음의 길이었다. 별세로 나가는 출구였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길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3-14절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홍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축복의 길이었으나 바로의 군대에게는 멸망의 길이요, 패배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었다.
그리고 홍해의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바다속 깊은 곳에 광야로 나가는 길이 있었다.

낮은 대로 임하는 길이었다.
예수님은 낮은 대로 임하셨다. 천국에서 마굿간으로 임하셨다. 구유에서 십자가로 임하셨다. 십자가에서 음부까지 내려가셨다. 영성생활이란 예수님처럼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낮은 데로 임하면 사람들에게 밟히고 무시당하게 된다.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한다. 겸손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낮은 데로 임하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흔들림이 없다. 안정감이 있다.

십자가가 복된 것은 무엇인가?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는 사랑이다. 희생이다. 생명이다. 사람은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한다. 고난은 피하려고 하고 주님의 영광은 누리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시 않았다. 십자가를 통해야만 부활이 있고, 고난을 통해야만 평강의 가치를 누린다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두 가지 복이 담겨있다.
1차적인 복이다. 1차적인 복은 주님으로 인해 내가 누리는 복이다. 이것을 우리는 평강이라고 부른다. 하늘이 주시는 평강이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로마서 16장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면서 우리에게 평강을 남겨 주셨다. 가난을 취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하게 하셨다. 주님은 우시면서도 우리에게는 웃음거리를 안겨 주셨다. 십자가를 지면 우리의 짐은 가벼워진다. 십자가를 벗으려하면 더 무거워진다. 왜 이렇게 삶이 기쁨이 없고 교회들이 시끄러운가? 십자가 앞에 서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 엎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2차적인 복이다. 2차적인 복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이것을 부활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나는 가난해지면서 남은 부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낮아지면서 남은 높아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죽어가면서 남은 살리는 것이다. 나는 희생하면서 남을 살맛나게 하는 인생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의 고난은 참을 만 한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 시킨 적이 없으시다. 이제 우리도 그분을 실망하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십자가 앞에 서야 한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도와 성도의 관계가 오래도록 아름다워질려면 희생과 헌신의 피가 있어야 한다. 노아의 방주가 역청의 향기로 가득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향기가 가득한가? 세상 사람들이 보아도 역청아 가득했던 방주처럼 우리 교회는 보혈의 향기가 세상을 가득채우고 있는가? 얼마나 희생하고 헌신하는 교회인가? 주를 위해 얼마나 손해를 볼줄 아는 교회인가?